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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적

장용영 : 정조가 만든 조선의 최강 군대

by 책먹는아재 2023.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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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준혁

출판사 : 더봄

저자소개

  한신대학교 교수. KBS '역사스페셜‘ JTBC ‘차이나는 클라스를 비롯한 다양한 방송 및 저술 활동을 통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지도 높은 역사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역사의 대중화에 힘을 쏟고 있다. 정조正祖가 건설한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에서 태어나 초··고교를 다니고, 정조와의 인연을 바탕으로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조선 정조대 장용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수원시 학예연구사로 임용되어 화성의 복원과 문화콘텐츠 개발에 참여하는 한편 수원화성박물관 건립을 주도하였다.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를 거쳐 2014년부터 한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회 위원과 민예총 문학위원회 위원,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리더라면 정조처럼』 『정조, 새로운 조선을 디자인하다』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정조와 다산의 꿈이 어우러진 대동의 도시 화성』 『정조가 만든 조선의 최강 군대 장용영』 『한반도의 운명을 바꾼 전투등의 저서가 있다.

목차

책을 펴내며 5

프롤로그 15

1무예신보를 편찬한 사도세자의 꿈 29

1. 사도세자는 무인세자인가? 31

2. 사도세자는 담대한 무인 기질이었다 38

3. 사도세자, 효종의 북벌론을 계승하다 47

4. 조선 최초의 무예서, 무예제보의 발견 63

5. 무예신보를 편찬한 사도세자의 꿈 73

2부 정조, 장용영에서 무예도보통지를 만들다 81

1. 정조가 사도세자 현양 사업을 추진한 목적 83

2. 무예도보통지편찬과 사도세자 추숭 91

3. 무예도보통지를 만든 사람들 96

4. 무예도보통지의 시연자, 조선 최고의 협객 백동수 103

5. 무예도보통지24기 무예 112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121

진설進說(경과보고서) 123

3부 정조, 호위부대를 만들다 129

1. 정조의 즉위와 반대세력들의 견제 131

2. 정조의 군제개혁 의지 141

3. 정조 시해 음모와 숙위소 설치 151

4. 홍국영의 역모와 숙위소 혁파 159

5. 정감록을 신봉하는 홍국영 추종세력 역모사건 166

6. 새로운 호위기구 장용위 설치 175

4부 정조, 마침내 장용영을 설치하다 181

1. 성호의 친위군병론親衛軍兵論과 장용영 183

2. 구선복의 역모와 장용영 설치 188

3. 장용영 창설 목적?1 -친위군 강화 197

4. 장용영 창설 목적?2 -균역법 혁파를 통한 민생안정 205

5. 장용영 창설 목적?3 -북벌을 위한 군사력 증강 213

6. 장용영 대장의 지위와 성향 223

5부 장용영, 조선의 최정예 군대 237

1. 장용영의 직제 개편 239

2. 장용영의 직제 구성 247

3. 장용영의 확대와 수어청, 총융청의 합병 258

4. 백성과 함께하는 장용영 마을 265

5. 장용영에 대한 특혜 274

6. 장용영의 훈련 - 바람으로 머리 빗고, 빗물로 목욕하라! 281

6부 화성에 장용영외영을 설치하라! 291

1. 장용영외영은 왜 만들었는가? 293

2. 장용영외영의 정비 303

3. 정조의 만석거 축조와 대유둔 조성 311

4. 만년제?축만제 축조와 축만둔[서둔] 조성 319

5. 장용영외영의 화성 방어와 어가 호위 325

6. 장용영외영 협수군 체제 333

7. 1795년 윤2월 화성행차와 백성들과 함께한 군사훈련 340

에필로그 355

참고문헌 364

 

내용요약

  사람들은 정조를 학자군주(學子君主)’라고 부른다. 반면에 정조가 갖고 있는 무인의 기질과 능력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다. 정조는 규장각(奎章閣)을 통해 국가의 국정 이념을 정립하였고, 각종 연구와 출판사업을 통해 조선의 문화를 한 단계 끌어올리며 문예부흥 시대를 열었다.

  정조는 무()에 대한 문()의 차별은 외세의 침략에 맞설 국방력을 무력화할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하며, 문무(文武)가 함께 발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실천하였다. 그래서 정조는 학문을 육성하기 위해 규장각을 만들고, 무예를 발전시키기 위해 장용영(壯勇營)을 창설했다. 문치규장 무설장용(文治奎章 武設壯勇)’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문무를 병행 발전시키고자 했다. 또한, 정조는 무()의 발전을 통한 조선 국방개혁의 중심기관으로서 장용영을 설치하였다. 그렇기에 정조는 진정한 무인군주(武人君主)’인 것이다.

  정조는 조선의 국왕으로 하루도 편한 날 없이 치열하게 살았다. 당파로 갈라져 싸우지 않는 세상, 신분으로 인하여 차별받지 않는 세상, 힘이 없어 외세에 침략당해 고통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재위 24년 내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1800628, ‘백성이 주인 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던 정조는 꿈을 이루지 못한 채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만다. 그의 죽음에 대한 추론은 2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정조가 쓰러지자 조선은 뿌리부터 흔들렸다. 바뀐 권력의 주체들은 그의 개혁을 하나씩 지우기 시작했다. 정순대비(정조의 할머니,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계모)가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가장 강력하게 밀어붙인 것이 장용영의 혁파였다. 표면적인 이유는 장용영에 있는 엄청난 재원 때문이었지만, 정순대비를 비롯한 벽파(노론 계열, 사도세자의 죽음을 옹호한 당파) 세력은 정조와 연관된 정치세력을 제거하려면 반드시 정조의 친위군영인 장용영을 없애야 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장용영 혁파는 철저한 정치적 논리에 의해 강제되었고, 장용영 창설을 통해 조선 후기 군제개혁과 민생 안정을 추구하고자 했던 정조의 개혁정책은 결국 좌절되었다.

  만약 정조가 그렇게 급서하지 않았다면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일관되게 추진하던 노비제도는 혁파되었을까? 1786년 박제가가 올린 상소 내용대로 서양 선교사들을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서양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을까? 혹은 그가 만든 장용영으로 국방력을 강화하고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대한제국 말기에 이르러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는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정조가 조선의 국왕으로 있었다면, 그래서 그의 개혁을 완성하였더라면 그 뒤를 잇는 왕이 누구였건 국정을 안전하게 운영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을 것이다.

  조선은 왕조사회였지만 정조의 개혁 사상은 시대를 초월하여 계승해야 할 사상이고, 그의 인간 존중과 소통의 정신은 오늘날 우리가 반드시 실천해야 할 것이기도 하다. 또한, 정조가 추진했던 지역이나 신분, 경제력으로 인한 차별 없이 균등한 기회를 보장하는 사회 만들기는 현재의 대한민국이 반드시 계승하고 실현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왜곡된 반민주주의를 혁파하고 새로운 민주사회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꼭 기억해야 할 사상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분단국가에서 통일국가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사도세자와 정조가 꿈꾸었던 자주 국가 건설이 실현될 것이다.

   “조선의 백성들은 선대왕의 백성으로 살았던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정조가 죽고 난 후 정조실록에 사관이 쓴 글이다. 이런 지도자를 만난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일 것이다. 이제는 군주 시대가 아니니 거꾸로 우리 스스로가 행복하고 기뻐할 지도자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정조의 국방개혁의 보루였던 장용영을 대중적인 관점에서 처음으로 연구한 이 책을 만나는 순간, 우리는 만주 벌판을 달리던 조상들의 기개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주 국가 건설을 추구하던 사도세자와 정조에 대해 아는 것은 곧 남북의 평화 시대를 여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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