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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적

칼과 책 : 전쟁의 신, 왕양명의 기이한 생애

by 책먹는아재 2023.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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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둥핑

출판사 : 글항아리

 

저자소개

  저장성 취저우 출신으로 저장대 철학과 교수 겸 학과장. 저장대 중국사상문화연구소장, 불교문화연구센터 주임 등을 겸하고 있다. 연구 분야는 인도 철학, 송명이학, 중국 불교철학 등이다. 미국 하버드대 옌칭 연구소, 캐나다 요크대, 파리어언 동 방문화학원INALCO, 인도 푸네대 등에서 연구 및 강의를 맡았다. 주요 저술로 천태종 연구』 『중화불교학 정신』 『왕양명의 생활 세계등이 있고, 중국 CCTV 인문학 교양 강좌 백가 강단에서 명재상 관중(管仲)」 「전기(傳奇) 왕양명을 강연했다.

 

목차

1장 특출했던 소년

2장 유별났던 청년

3장 나만의 길

4호랑이때려잡기

5장 구사일생

6장 용장(龍場)에서 도를 깨치다

7장 지행합일(知行合一)

8장 위기 속에서의 특명

9장 강서(江西) 전투

10장 이두(浰頭) 평정

11장 영왕(寧王)의 반란

12장 영왕 생포

13장 황당무계한 황제

14장 치욕 속에 받은 사명

15장 양지설(良知說)

16장 새로운 임무

17장 최후의 전투

18장 광명정대한 세상

후기

옮긴이의 말

왕양명 일대기

찾아보기

 

내용요약

  중국 자금성 남문 밖, 한 관리가 바지까지 내린 채 곤장을 맞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조정 관리로서 사람들 앞에서 곤장을 맞는다는 건 엄청난 치욕이자 인격 모독이었다. 그 관리는 흠씬 두들겨 맞은 뒤 옥에 갇힌다. 다행히 살아남아 유배지로 향하게 되지만, 가는 길 내내 자객이 따라붙어 목숨을 위협받는다. 이 불행한 이야기의 주인공인 관리가 바로 중국 역사에서 위인으로 손꼽히는 왕양명이다. 그는 입바른 말로 당시 황제의 총애를 받던 환관 유근의 심기를 거슬러 그러한 곤욕을 치르게 된 것이다. 말단 관리였던 왕양명은 정계를 어지럽히고 백성의 삶을 고달프게 하는 환관의 전횡과 횡포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다가 곤장형에 처해지고 감옥에 갇힌 후 급기야 귀주 용장으로 귀양살이까지 떠나게 된다.

  용장으로 향하는 길에 자객에게 쫓기던 왕양명은 기지를 발휘한다. 절명시를 짓고 자살로 위장해 강으로 뛰어든 후 추격을 따돌린 것이다. 이렇게 어렵사리 용장에 도착하긴 했지만, 그곳은 척박한 땅인 데다 생활 여건도 열악했다. 그럼에도 그는 양명 동굴에 기거하며 학문 연구를 계속해나갔고, 서원을 지어 제자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왕양명은 현실을 등진 채 학문에만 심취한 선비는 아니었다. 그는 애민 정신을 가진 관료였고,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용장에서 사는 소수민족 주민들을 돌보았다. 유배 생활을 백성들의 삶을 가까운 곳에서 살피는 기회로 삼아 불합리한 조세제도를 해결하는 등 불편을 해소했다. 그리고 주거 환경이나 낡은 풍습을 개선하면서 마을 공동체를 발전시킨다.

  왕양명이 살았던 명대 중기는 정치적·사회적으로 불안정했다. 곳곳에서 재물을 약탈하는 도적 떼가 창궐했고, 조정 대신들의 탐욕과 전횡으로 인해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그러던 중 왕양명은 조정으로부터 도적 떼와 반란 세력을 토벌하라는 임무를 맡게 된다. 정덕 10(1515)을 전후로 한 시기에 강서·복건·광동·호광 등에서 할거한 도적 떼의 세력은 크게 세 파로 나뉜다. 하나는 복건성 장주부 경내의 도적 떼로 첨사부(詹師富온화소(溫火燒)가 수괴였고, 또 하나는 강서성 남안부(南安府감주부 경내의 도적 떼로 사지산(謝志珊남천봉(藍天鳳)이 수괴였다. 나머지 하나는 광동성 혜주부(惠州府) 경내의 도적 떼로 지중용(池仲容)이 수괴였다. 3대 도적 떼는 각기 수천 명 이상의 방대한 세력을 형성했고 그 기세 또한 대단했다. 조정에서 왕양명을 내려보낸 시기는 바로 수차례에 걸친 관군의 토벌이 실패를 맛본 뒤였다.

  그는 호구 조사제와 유사한 십가패법을 도입해 민가와 도적 간의 내통을 막는 고립화 전략을 취했다. 또한 기존의 낭병에 의존하던 구조를 개혁하기 위해 민병을 양성해 관군을 정예화했다. 원래 명군은 도적 떼를 토벌하러 갈 때 토병(土兵)’이나 낭병(狼兵)’을 동원했는데 모두 소수민족 출신 병사를 가리킨다. 한족이 아닌 현지 원주민 출신이다. 왕양명은 낭병 동원이 원거리 작전에서 다음과 같은 폐해가 있다고 분석했다.

(1) 낭병을 동원하면 짧게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해를 넘기기도 하는 등 시일이 많이 소요되어 작전의 순발력이 떨어진다. (2) 군비 소모 등 재물의 낭비가 심하다. (3) 전투 목표가 방대하여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잦다. (4) 기율이 문란한 낭병이 지나가는 마을에서의 폐해가 극심하여, 심할 때는 도적 떼보다 더 심각한 경우도 발생한다. 이에 왕양명은 낭병에 대한 지나친 의존심, 전투에 대한 공포증을 개선하려면 관군의 정예화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병법과 무술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실전에서 그 지식과 지혜를 활용했다. 오늘날 정보전이라 할 만한 전략인 '기만전술'을 활용해 연전연승을 거둔다. 명 황제가 친정을 나설 정도로 골치 아픈 영왕의 반란세력을 소수의 병력으로 마침내 진압한다.

  반란 진압 총책임자로 나선 왕양명의 전투 전략을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적의 동태 파악이다. 감주 부임 직후 그는 실지 조사를 통해서 이미 적과 아군의 병력 규모나 작전 수행 능력에 대한 실태를 다 파악하고 있었고, 정찰병을 내보내 적의 동향까지도 알아냈다.

  둘째, 고립화 전략이다. 병력을 배치할 때 산으로 통하는 모든 길을 철저하게 봉쇄했다. 또한, 적과 산 아래 주민이 연결되는 도로와 적들 간의 연결 도로도 전면 봉쇄하여 그들의 연결망을 봉쇄한다. ‘십가패법을 엄격하게 시행한 것 역시 적의 정보 탐색을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셋째, 집중 포위 전략이다. 당시 적의 근거지는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었기에 관군이 한쪽으로만 공략해서는 제대로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적은 동쪽을 공격하면 서쪽으로, 서쪽을 공격하면 동쪽으로 달아나는 형국이었다. ‘장남 전투에서도 그는 우선 광동·복건의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적을 동서 방향으로 포위 공략했는데, 이 전략은 실전에서 효과적이었다.

  넷째, 살상 최소화 전략이다. 도적 떼의 수괴는 처결하되 살상은 최소화하는 것 역시 왕양명의 주요한 전략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전쟁은 적의 섬멸하는 것뿐만 아니라 백성의 피해를 줄이는 것도 중요했다. 원래는 선량했던 백성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도적 떼에 가담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네 가지 전략을 보면 왕양명의 명민한 합리성과 승부 근성, 애민 정신이 모두 녹아 있다.

  하지만, 그의 능력을 시기한 세력의 모함으로 인해 그의 인생은 또다시 난항을 겪게 된다. 13황당무계한 황제에서 나타나는 명 조정의 행보는 사욕에 충만한 무지한 황제가 감언이설에 놀아난 최악의 사례를 보여준다. 왕양명이 다 평정해놓은 반란 지역에 내려와 소위 친정(親征)’이란 깃발을 내걸고 군대놀이를 해보겠다는 황제 앞에서 왕양명은 좌절했다. 만약 황제가 내려온다면 전투가 끝난 직후 민생의 참혹함이 극에 달했던 강서 지역에는엄청난 부담이 될 것이 분명했기에, 황제가 내려오는 걸 막는 일이 왕양명에겐 지상 과제가 되었다. 그는 포로 압송을 중단하고 짐의 도착을 기다리라는 황명을 무시하고 병든 몸을 이끈 채 강서 지역의 전후 질서 회복에 주력했다.

  그러나, 황제를 따라 내려온 강빈·허태 일당은 심지어 날조된 죄명을 내세워 왕양명을 체포하려고까지 했다. 당시 왕양명은 강서 순무 부임길에 있었기 때문에, 우선 그들은 길안 지부로 있으면서 반란 평정에 큰 공을 세운 오문정(반란 평정 후 그는 강서 안찰사로 승진했다)부터 체포하여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장충 무리의 사주를 받은 북방 병사들은 왕양명을 만날 때마다 대놓고 욕설을 퍼붓거나 시비를 걸었다. 이 책은 왕양명이 이러한 불합리하고 몰염치한 정치의 한복판에서 어떻게 처신해나가는지를 매우 자세히 보여준다.

  왕양명은 절강성 여요에서 왕화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이하고 특출났으며 열두 살에 이미 자신이 성인(聖人)이 되고자 공부한다고 밝히곤 했다. 열다섯의 나이에 군사 정세를 살피러 혼자 변방으로 나가 기마와 궁술을 익혔고, 당시 사상계의 주류 학문인 주자학에 몰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타고난 재능을 시기하는 이가 많았던 탓인지, 당시 관직이 꽉 차 있던 탓인지 왕양명이 과거에 급제해 정계에 진출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여느 위인전에 나오는 장원 급제 이야기와 달리 왕양명은 과거 시험에 두 차례 이상 낙방했다. 하지만 그의 목표는 과거 급제가 아니라 성인이 되는 것이었기에 실패에 개의치 않고 실천적 자세로 학문을 탐구하는 데 열중한다.

  이후 유학을 성학(聖學)으로 삼고 이에 집중하긴 했지만, 왕양명은 학문을 수양하는 데 도교의 양생술, 불교의 선종 사상을 포괄하는 등 그 경계가 없었다. 과거 시험에 합격한 후 백성을 돌보는 관료로, 전장을 지휘하는 장수로 바쁘게 지내는 동안에도 학문 연구와 강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서른네 살부터 제자를 받아들여 죽을 때까지 성인의 도를 가르쳤다. 유배지인 용장에서 왕양명은 주자가 이야기한 격물치지설, 사물을 관찰한 후 지식을 얻은 후에야 천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관점이 세상의 이치와 맞지 않음을 깨닫는다. ‘용장에서 도를 깨쳤다고 하여 이를 용장오도(龍場悟道)’라 한다.

  ‘용장오도이후 왕양명은 자신의 사상 체계를 공고하게 다져갔다. 그는 앎과 행동이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인간 본연의 마음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이를 정리해 심즉리(心卽理)’ ‘치양지(致良知)’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자신만의 새로운 학설을 주창하기에 이른다. 여기에는 골방 철학자가 아닌 현실에 두 발을 디딘 채 정치와 전장을 누빈 그의 경험이 녹아 있다. 그의 사상 체계를 간단히 말하면 양지(良知)’라고 할 수 있는데, 왕양명은 양지에 이른다혹은 양지를 다한다라는 뜻의 치양지를 통해 의 합일을 이뤄야 한다고 했다.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큰 사명을 주려고 할 때는 먼저 그의 심지를 고통스럽게 하고, 그 힘줄과 뼈를 지치게 하고, 그 육체를 굶주리게 하고 궁핍하게 만들어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어지럽힌다. 이는 그의 마음을 흔들어 인내심을 키움으로써 지금껏 할 수 없었던 사명을 감당케 하려 함이다.” 이 말은 왕양명의 일생에 그대로 투영된다. 일찍이 성인이 되고자 마음먹고, 공명정대한 태도로 관료직을 수행한 그에게 암울한 현실 정치는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파란만장하고 고달픈 인생역정은 그 길을 의연하게 걸어간 그에게 사상과 철학의 정신적 동력이 되었다. 왕양명이 고결한 인품으로 불세출의 위업을 달성하고, ‘기이하고 특출한인물이 될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런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는 입덕(立德)’ ‘입업(立業)’ ‘입언(立言)’ 의 관점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뤄 후대에 삼불후(三不朽)’라 평가받았다.

   이치만을 따지는 이학(理學)에서 벗어나 인간의 마음에 주목하는 왕양명의 심학(心學)은 많은 지식인에게 논쟁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세간으로부터 주목받았다. 그의 학문과 사상 체계는 하나의 학문이 되어 한 시대를 풍미했고, 명 중엽 이후로 양명학으로 불리게 된다. 양명학은 누구나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는 전제하에 마음을 어떻게 수양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춘 철학이다. 그의 철학은 종교의 장벽을 넘나들며 유(), (), () 3교의 일치론을 낳았다. 또한, 양명학은 주자학 일색이던 동아시아 사상 체계의 흐름을 바꾸고, 근현대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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