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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적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by 책먹는아재 2023.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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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 오항녕

출판사 : 너머북스


저자소개

  현재 전주대학교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있으며,  2018~2019년 중국 연변대학교 역사학과에서 가르치고 있다. 고려대학교 사학과에서 조선시대 사관제도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지곡서당(태동고전연구소)과 한국사상사연구소에서 사서삼경 등 고전학을 공부했다. 국가기록원 전문위원과 팀장을 지냈고, 인권연대 운영위원과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을 맡고 있다. 기록과 인간, 조선 문명, 기억과 시간 등을 주제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호모 히스토리쿠스』,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조선의 힘』, 『기록한다는 것』, 『밀양 인디언』, 『한국 사관제도 성립사』, 『조선초기 성리학과 역사학』 등이 있고, 역서로 『사통(史通)』, 『대학연의(大學衍義)』, 『국역 영종대왕실록청의궤(英宗大王實錄廳儀軌)』, 『문곡집(文谷集)』, 『존재집(存齋集)』 등이 있다.


내용 요약

  1623년 인조(계해)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 정권. 조선시대 내내 혼군(昏君, 판단이 흐린 임금)으로 불렸던 광해군. 그러나 20세기 들어와 실용주의 외교로 백성들에게 은택을 입힌 택민(澤民) 군주로 재평가되었다. 그 기원은 놀랍게도 식민지시대 조선사편수회의 간사였던 일본인 학자 이나바 이와키치. 이렇게 광해군은 20세기에 화려하게 부활했다.

역사인식에서 비판적인 성향이거나 보수적인 성향이거나를 막론하고, 또 교과서든 대중서든 전문연구서든 가리지 않고 고르게 재평가를 받으며 복권되어 부활하다 못해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21세기에도 광해군은 건재하다. 이 책은 이런 부활과 권세에 대한 비판이다. 오항녕 교수(전주대 역사문화학과)는 지난 100년 동안 추켜세웠던, 조선시대 사람들 표현대로 하면 다시 성군(聖君)이 되었던 광해군에 대해 “그는 본보기가 될 거울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망칠 위험한 거울입니다.”라며 이 책을 21세기 초입에 시도하는 광해군에 대한 새로운 반정(反正)이라 한다.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은 정반대로 왜곡된 광해군 시대를 바로잡는다는 소극적 기획은 아니다. 역사 속에서 국가를 망치는 과정을 살펴보면 국가를 다시 세우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은 조선의 15대 임금 광해군과 그의 시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진실이 담긴 이야기다. 이 책은 그 전모를 크게 3시기로 그려낸다.

  1기는 즉위부터 1613년(광해군5) 계축옥사까지이다. 정치세력이나 정책 모두 선조 후반부터 다루는데, 이 시기는 북인 중심으로 정치세력이 형성되지만 서인, 남인들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시기이다. 새로운 국왕은 즉위하자마자 1년여 동안 친형 임해군을 진도로 귀양 보냈다가 강화에서 죽였고, 아버지 선조의 신하에게 죽음을 내리는 등 정치적 탄압이 진행된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민생과 재정 안정을 위해 대동법을 추진했고, 백성들은 지지했다. 왕실과 집권 북인은 이권을 지키기 위한 본심을 서서히 드러냈다. 대동법 추진자들은 하나둘 조정을 떠나든지 귀양을 갔다.

  2기는 1613년부터 1617~1618년 무렵까지이다. 본격적으로 북인(대북) 정권이 독주하면서 타 정치세력을 배제하는 시기이다. 대동법은 물 건너갔고, 궁궐 짓는 망치 소리만 들려온다. 광해군은 늘 궁궐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며 새 궁궐을 지으라고 한다. 경연은 문을 닫은 지 오래여서 위아래가 소통하지 않는다. 광해군은 경연 대신 죄인을 심문하는 추국청으로 나간다. 실록 편찬은 요원할뿐더러 기록도 부실하다.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위한다. 이이첨을 위시한 신하들은 권력과 잇속만 챙기고, 광해군의 멘토 정인홍은 아집에 갇혀 있다. 침묵의 정치, 배제의 정치였다.

  3기는 1617~1618년부터 계해반정까지이다. 드디어 불안한 정치 때문에 북인 세력 내에서도 이탈 현상이 나타나고, 이탈하지 않은 자들은 서로 싸운다. 윤선도는 이이첨을 비판하고, 허균은 동지 이이첨에게 죽임을 당한다. 관직도, 상벌도, 과거급제도 매관매직의 대상이 된다. 남은 것은 궁궐 공사이다. 후금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관심은 말뿐이다. 군량미도 궁궐 공사비로 쓴다. 심지어 심하 전투 이후, 전사자와 부상자 집안에 주라고 명나라 황제가 준 은 1만 냥조차 공사비로 쓴다.
  민생과 재정의 안정, 건강한 정치, 풍요로운 문화의 창출, 변동하는 국제정세에 대한 능동적 대처 등 너무도 절박하고 중요했던 그 시기를 그렇게 허망하게 보내버렸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상황을 더 악화시켜버린 채로 방치하고 있었다.
 

1장 새로운 정치의 시작

  선조 승하 후 14일 만에 귀양을 간 임해군. 그는 다음 해 강화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반역을 꾀한 역모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빈곤한 관련자들과 무기들. 새로운 정치(新政) 초기 넉 달을 매달린 옥사치고는 너무 미미했다. 이 옥사와 임해군의 죽음에 광해군이 관련되어 있다고 사람들은 믿기 시작한다. 임해군 옥사는 명나라를 자극하고, 결국 조선과 명나라의 외교 관계에서 뇌물 수수라는 전례를 만들어낸다.

2장 가는 사람 오는 사람

  역사의 변화는 사람의 변화에서 실감할 수 있다. 여기서는 변화 가운데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 가능성과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가능성을 가늠해보려는 것이다. 동서, 남북, 대북과 소북의 분리를 간략히 살피고, 선조 말의 실권자 유영경(柳永慶)의 거취, 광해군대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던 정인홍(鄭仁弘)의 등장과 최후를 본다.

  유영경은 광해군-정인홍-이이첨으로 이어지는 권력의 라인에 맞서 자신이 영창대군과 결탁하여 권세를 이어가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정치권력은 사용하는 이에 따라 사욕(私慾)에 의해 움직이기도 하지만 공기(公器)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잊은 듯하다.정인홍의 상소는 의도와는 달리 스승인 남명을 욕보이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이런 배타성과 독단성은 계속 광해군 정권, 북인 정권의 기반을 축소시켜 갔다. 계축옥사와 폐모론은 거의 정인홍의 지침대로 전개되어갔다. 후일 정인홍은 공초에서 자신의 이런 혐의를 부인하고 있지만, 다른 많은 사료들은 정인홍의 이러한 진술이 허구였음을 입증하고 있다.


3장 먹는 것이 하늘이다

  ‘광해군이 대동법을 시행하려고 했는데, 양반 지주들이 반대하여 못했다’는 통념과 달리 이 책은 광해군과 핵심 대북세력이 대동법에 반대하고 있었음을 확인한다. 대동법을 반대하던 대북세력이 대동법을 통해 공납제 개혁을 추진하던 세력을 몰아낸 것이 계축옥사였다. 대동법의 좌절에는 광해군 재위시절 지속되었던 토목공사가 한몫을 했다. 물자와 인력이 대대적으로 동원되는 궁궐 공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조세제도를 개혁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대동법의 전제가 되는 토지조사는 안중에 없었고, 공납을 조정하기는커녕 막대한 특별 공물을 더 거뒀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군주라면 먼저 내려야 할 두 가지 정책 판단이 있었다. 첫째, 재정 규모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조 말 임시 양전(量田) 이후로는 토지 결수를 파악하기 위한 양전이 아예 이루어지지 않았다. 둘째, 그 재정 규모에 기초하여 정책의 우선순위를 결정해야 했다. 당연히 대동법을 통한 민생 안정이 우선이었으나, 광해군은 농업사회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과대 소비 중 하나인 토목을 선택했다. 전쟁을 피하긴 했으나, 민생 안정 대신 막대한 재정지출이 수반되는 토목사업(궁궐공사)을 택한 것이다.

4장 경연보다 친국이다

  경연은 오늘날 국무회의 성격 그 이상이었다. 국정의 철학을 공유하는 자리, 민생과 인간의 도리에 대한 비전을 공유하는 제도였다. 광해군은 ‘아프다, 춥다, 덥다’며 일관되게 미루었다. 광해군이 폐위된 이유가 경연만이 아니겠지만 중요한 점은 ‘시스템의 붕괴’라는 것이다. 광해군은 대신에 친형인 임해군 옥사에 매달렸다.

  이 불쾌한 서막은 광해군 4년 김직재 옥사, 광해군 5년 칠서의 옥에 이은 계축옥사, 광해군 6년 영창대군의 증살(蒸殺), 그리고 인목대비의 폐위로 이어진다. 조선시대에 광해군만큼 친국(親鞫, 왕이 직접 국문에 참여하는 것)에 집착한 군주는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親鞫’을 검색하면 영조가 401건 광해군이 344건이다. 영조는 재위 50년이 넘고, 광해군은 15년이다. 광해군은 경연 대신 추국청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5장 기억을 바꾸고 싶다

  경연이 국정에 앞서서 준비하고 토론하는 과정이라면 사관은 정책이 끝난 뒤에 이루어지는 평가의 성격을 띤다. 국왕이 즉위하면서 내리는 첫 번째 전교가 ‘신록을 편찬하라’는 통례를 깨고 광해군은 즉위 후 1년 반이 지나서야 실록청을 설치하였다. ‘이항복-이정구-신흠’으로 구성된 실록편찬 라인을 이이첨으로 대체한 뒤 무려 9년 만에 《선조실록》이 편찬되었다. 그러나, 이이첨 등 《선조실록》 편찬자들은 공정성의 관점에서 신뢰를 얻지 못했다. 또 임진왜란과 같이 사초가 손실되는 사태가 있었더라도 통상 1~3년 안에 마치던 실록 편찬을 10년 가까이나 되어서야 마쳤다는 것은 비판을 면하기 어려운 점이다. 

  이런 이유로 《선조실록》은 계해반정 뒤 수정 요구에 부딪혔고, 결과는《선조수정실록》의 편찬으로 이어졌다. 조선 후기 네 차례 있었던 실록의 수정, 개수의 시발점이 바로 《선조실록》의 불공정한 편찬에 의한 《선조수정실록》 편찬을 낳았다는 점에서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긴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다행히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하고도 궁극적인 평가는 후세 사람들이 내린다는 원칙 아래 《선조실록》을 그대로 보존했던 당국자들의 역사의식 덕분에 우리는 오히려 두 실록을 놓고 풍부한 역사적 상상력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선조실록》의 불공정한 편찬이 합리화될 수는 없는 일이다.

6장 과대소비의 소용돌이

   현재 광해군을 재평가하는 사람들이 눈을 감든지 어물쩍 넘어가는 사안 중의 하나가 광해군대 내내 계속된 궁궐공사다. 광해군을 폐위시킨 결정적 이유 중의 하나인 토목공사에 대해 그다지 주목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주목하더라도 다른 정책이나 상황과의 연관성을 고려하지 않고 왕권강화라는 일반적인 해석으로 숨어버린다. 선조 대부터 짓기 시작한 창덕궁이 완공되고서도 광해군은 창경궁, 경운궁을 다시 지었다. 공사는 점점 커졌다.

  새로 짓기 시작한 인경궁과 경덕궁은 그 규모가 상상 밖이었다. 최소한으로 잡아도 국가재정의 15∼25%를 썼다. 이 비용은 현재 대한민국 국가 예산 중에서 교육비나 국방비가 차지하는 비중과 같다. 그러고도 세금을 25퍼센트 더 올렸다. 나라의 1년 치 무기 제조에 들어가는 철보다 10배가 되는 철을 석 달 동안 궁궐 짓는 데 허비했다. 이 정도면 북쪽에서 흥기하는 후금에 대한 방비는 이미 포기한 것으로 봐야 한다. 공사비용이 바닥나자 공명첩을 뿌렸다. 죄를 면제해주는 대신 은을 받았다. 급기야 군량미를 전용하기까지 한다.

  강화에 있는 훈련도감의 쌀 9천여 석까지. 광해군 10년 10월이 되어서도 광해군은 궁궐을 지을 목재 조달에 몰두했다. 바다를 방어하는 군선까지 재목을 운반하는 데 동원했다. 이듬해인 광해군 11년 3월 이런 상태로 조선은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대후금 파병을 했고 준비 없는 파병의 결과는 참담했다. 조선군사 1만3천여 명 중 9천명이 전사하였고 살아남은 자들은 포로로 잡혀 농업노동에 노예로 동원되었다. 파병과 참패는 재정의 파탄과 군정(軍政)의 방치가 빚어낸 결과라는 점에서 훨씬 오랜 원인을 가지고 있었다.

7장 절망 속에 피는 희망

  잘못 끼운 단추를 바로잡지 않고 계속 끼우다 보면 하나 이상의 구멍이 남는다. 종종 바보들은 계속 단추를 끼우다가 필경 구멍을 남긴다. 그리고 우긴다. 원래 이런 옷이라고, 이것도 패션이라고. 이런 억지는 사태를 한층 궁색한 지경으로 몰고 가고, 심지어는 그동안 동조했던 자들조차 등을 돌리게 만든다. 그렇게 궁색한 지경을 보여 주는 사태가 국내에서는 폐모론이고, 대외적으로는 흔히 중립외교로 추앙받는 후금 정책의 무기력함이다.

  광해군과 이이첨, 정인홍에 동조했던 자들의 자의, 타의로 등을 돌리는 상황은 윤선도의 이이첨 비판 상소, 그리고 허균을 역모로 몰아가는 데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이런 난맥 속에서 광해군은 정책과 사안에 대한 판단 능력을 상실하는 차원을 넘어 아예 손을 놓는 상황이 도래했다. 그리고 민심은 차츰 새로운 사람들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의 소감

  내 기억 속의 '광해군'은 중립외교를 통해서 꺼져가는 명나라와 맹렬하게 커져가는 후금 사이에서, 조선의 안위를 위해 노력했던 군주였다. 또한, 영화 <광해>에서 보여주는 그의 면모 역시 현재를 사는 이들에게 좋은 군주의 모범으로 인식되었다.  이 책은 이러한 관점의 정반대편에서 광해군의 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역사를 바라보는 눈이 편향되면 안된다는 생각 또는 균형잡힌 세계관의 정립이라는  관점에서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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