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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5
졸린다. 잠을 청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단독 도보여행길이 내겐 설렘 그 자체였던가. 마치 각성제를 들이킨 듯, 맑아지는 머릿속 한 켠을 허물어내기가 힘들다. 떠난다. 시월초에 계시처럼 떠오른 산티아고 순례길 도보여행은 거부할 수없는 집념이 되었고 이제 떠난다. 무엇이 날 기 다리고 있을지 혹은 누가 날 대면하게 될지 기약이 없지만 아랑곳없이 떠난다. 이 여행이 내게 무엇을 줄지는 짐작할 수 없지만, 그냥 떠난다. 청량리역을 향하는 기차에서 잠시 잠을 청한다.
0105, 18:58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기내에서 만난 할머니랑 담소를 나눴다. 손녀딸이 여기서 바이올린 공부하는 음악영재라고 은근히 자랑스러워하신다. 할머니의 가식없는 자랑에 덩달아 흐뭇했지만 기러기 아빠가 안쓰럽다. 말로만 듣던 러시아 미녀가 공항에 가득하다. 탑승구 근처에 앉아 있으니 그 중 하나가 정면으로 앉는다. 괜한 오해를 받을까 싶어 슬금 쳐다보니 미모가 바람직하다. 그닥 크지 않은 체구가 귀엽다. 와이파이는 터졌다 꺼져버린다. 마드리드에선 다시 터지길. 기다리는 시간이 다소 지루하긴 했지만 '사람구경'이 무료함을 덜어준다. 서울에서부터 앞서거니 뒷서거니 한 여인이 눈에 띤다.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어색해서 계속 딴청을 부리는중이다.
0105, 22:50
마드리드로 가는 비행기 옆자리에 '이브게니'라는 청년이 앉았다. 짧은 영어로 대뜸 말을 건다. 볼가강 언저리에 사는 친구인데 현대에서 만든 트럭 5대로 운수업을 한다고 한다. 이제 서른이라면서 내 나이를 묻길래 사십대 초반이라고 얼버무렸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그 친구 눈엔 내가 그리 동안인가? 젊어서 블라디보스톡과 일본을 왕래하던 뱃사람이었단다. 그 덕분에 견문이 많아서인지 사람을 대하는 넉살이 좋다. 헤어질 땐 마침내 통성명을 하고, 서로의 안전을 기원한다. 이 친구가 등산을 좋아해서 아버지 친구들과 칠레로 가서 트레킹을 할거란다. 늘 꿈만 꾸던 것을 하러간다니 부럽다. 그 친구도 걸어서 여행하겠다는 내 계획을 부러워한다. 마드리드 공항에 도착했으나 와이파이가 잘 안된다. 이유는 알수없음. (새벽 6시에 아토차역까지 가는 공항버스를 5유로에 탔다. 와이파이가 잘 터진다. 이 여행에 관심있는 지인들과 드디어 카톡메시지를 교환한다.) 이브게니와 작별하고 공항에서 빈둥거리며 기차시간을 기다린다. 산미구엘 맥주와 베이컨 샌드위치(8.35유로, 알고보니 그닥 싼 음식은 아니었다)로 한끼를 때운다. 이브게니 마눌님은 트레킹을 즐기는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내 마눌님과 같은 입장인 듯. 허나 그녀들이 고맙게도 이 여행을 윤허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덕분에 모두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으니 그것으로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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